작가
출생지 아르장탕, 프랑스
페르난 레제의 삶
페르난 레제의 이야기는 노르망디 하부 지역의 오른(Orne) 주에 위치한 아쟁탕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시작됩니다. 1881년 2월 4일, 외아들로 세상에 태어난 그의 유년 시절은 프랑스 전원 지대의 고요함과 어머니 마리-아델 도누(Marie-Adèle Daunou)의 보살핌 속에서 형성되었습니다. 가축 상인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아버지는 페르난이 아주 어린 시절 세상을 떠났고, 아이는 경건하면서도 겸손한 성품을 지닌 어머니의 손에서 자라나게 되었습니다.
노르망디의 농촌 풍경 속에서 보낸 이러한 성장 배경은, 훗날 그가 프랑스 문화의 중심지에서 누리게 될 역동적인 삶과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그의 뿌리는 대지와 농경 생활의 물리적 실체에 닿아 있었지만, 그의 정신은 현대 문명이 지닌 복잡한 이면으로 끊임없이 이끌렸습니다. 결국 그는 아쟁탕의 경계를 훨씬 넘어 다양한 예술적 영역을 개척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는 단순히 캔버스라는 틀에 자신을 가두지 않았으며, 조각과 영화라는 움직이는 이미지를 통해 자신의 예술적 비전을 확장하고자 끊임없이 갈구했습니다.
그의 삶은 유년 시절의 유기적인 질감과 도시의 구조적이고 기계적인 리듬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는 여정이었습니다. 변화하는 세기의 격변을 헤쳐 나가는 과정에서 이러한 이중성은 그의 존재를 정의하는 핵심적인 요소가 되었습니다. 그의 행보는 결코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어린 시절 경험한 전통적인 세계와, 훗날 그의 예술을 통해 정의하게 될 미래의 급격한 산업적 맥동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이 그의 삶을 관통하고 있었습니다.
유년 시절, 가족 그리고 예술적 훈련
페르난 레제의 예술적 비전은 프랑스 노르망디 하부 지역의 오른(Orne) 주, 아쟁탕의 평온한 농촌 풍경 속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축산업이 중심이던 세상에서 태어난 그의 유년 시절은 대지의 물리적인 질감과 농경 생활의 규칙적인 리듬에 의해 형성되었습니다. 이러한 실재하는 노동의 세계에 대한 경험은 훗날 그가 펼쳐 보일 더욱 복잡하고 심오한 예술적 탐구 아래에 고요한 밑바탕으로 남게 됩니다. 외아들로 태어난 그는 경건하면서도 겸손한 어머니의 보살핌 속에서 성장했으며, 그의 초기 행보는 건축이라는 구조적이고 규율 잡힌 학문으로 향했습니다. 1897년부터 1899년까지 그는 이 기술적인 공예에 전념하며 공간의 논리와 정밀한 제도(製圖)의 필요성을 익혔습니다.
1900년에 이르러 도시가 내뿜는 강렬한 이끌림을 이기지 못한 그는 파리로 이주합니다. 그는 건축 제도사로서 생계를 이어갔는데, 이는 선과 비례를 포착하는 예리한 안목을 요구하는 일이었습니다. 건축을 통해 다져진 구조적 이해는 그의 예술적 토대가 되었지만, 그의 마음은 점차 캔버스를 향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명문 에콜 데 보자르(École des Beaux-Arts)에 입학하기를 갈망했으나, 정식 학생으로서의 지위를 얻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고 비정규 학생으로서 학교를 다니며, 아카데믹한 예술계의 주변부를 맴돌면서도 거장들의 가르침을 스펀지처럼 흡수했습니다. 때로는 방황의 시기로 묘사되기도 하는 이 학습의 기간은, 훗날 그가 자신만의 시각으로 세상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데 사용할 기술적 숙련도를 연마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과정이었습니다.
세잔과 입체주의의 영향
1907년, 살롱 도톤느(Salon d'Automne)에서 열린 세잔의 회고전을 마주한 순간, 페르난 레제의 예술 세계에는 거대한 전환점이 찾아왔습니다. 이 강렬한 만남은 촉매제가 되어 그를 유년기의 부드러운 인상주의적 화풍에서 끌어내어, 사물의 구조를 꿰뚫어 보는 보다 근원적인 시각으로 인도했습니다. 그는 이제 사물의 표면 너머를 응시하기 시작했습니다. 대신 세상을 정의하는 근본적인 기하학적 질서를 탐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1909년에 이르러 파리의 예술적 흐름 속에서 그의 존재감은 더욱 뚜렷해졌습니다. 알렉산드르 아르치펜코, 자크 리피츠, 샤임 수틴, 그리고 로베르 들로네와 같은 거장들과의 교류는 단순한 사교를 넘어, 새로운 사상들이 충돌하며 그의 예술적 비전을 구체화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그는 '황금 비율(Section d'Or)'로도 알려진 퓌토 그룹(Puteaux Group)의 예술적 궤도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습니다. 장 메칭거, 앙리 르 파우니에와 함께 활동하며 그는 이 새로운 시각 언어가 지닌 수학적, 구조적 가능성을 끊임없이 탐구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앞선 이들이 닦아놓은 길을 따르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당대의 미학을 정의하던 파편화된 평면과 중첩된 형태들 사이에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길을 개척하고자 분투했습니다. 이러한 치열한 실험의 시간은 1911년 살롱 데 앵데팡당(Salon des indépendants)에서 열린 그의 첫 주요 전시로 이어졌고, 그곳에서 그는 숲속의 누드(Nudes in the Forest)를 선보이며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켰습니다.
숲속의 누드 (1911)
전쟁과 기계적 시기
제1차 세계 대전의 혼돈은 예술가를 파리의 화실에서 끌어내어 전장의 가혹한 현실 속으로 던져놓았습니다. 1914년부터 1917년까지 프랑스군에서 복무한 페르난 레제는 아르곤 숲에서 2년이라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 전쟁은 단순히 그의 삶을 둘러싼 배경에 머물지 않고, 형태를 바라보는 그의 근본적인 지각을 뒤흔든 변혁적인 힘이 되었습니다. 1916년, 겨우 목숨을 건진 머스터드 가스 공격은 그를 회복의 시간으로 몰아넣었고, 그가 회복하는 동안 주변 세계는 산업적 파괴가 지닌 압도적인 힘에 의해 재편되고 있었습니다. 같은 해 짧은 휴가를 얻었을 때조차 그는 붓을 들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파이프를 든 군인을 탄생시켰습니다. 이 작품은 전장을 지배하는 기계의 특성이 인간의 형상에 스며들기 시작한, 새로운 현실의 감각을 포착해 냈습니다.
1917년에 이르러 그의 창조적 정신에는 뚜렷한 변화가 찾아왔으며, 이는 훗날 '기계적 시기'라 불리게 될 예술적 여정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그는 현대 전쟁과 산업 기술의 도구들 속에서 기묘하고도 리드미컬한 아름다움을 발견했습니다. 매끄러운 원통형의 형태와 정밀한 기계 부품들은 그의 새로운 시각 언어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사물들을 차갑거나 비인격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강인함과 현대적 존재의 혼돈을 질서 있게 조직하는 능력에 매료되었습니다. 전쟁은 초기 작품들이 지녔던 부드러운 경계들을 앗아갔고, 그 자리를 변화하는 시대의 강철과 피스톤을 닮은, 날카롭고 구조적인 명료함으로 채워 넣었습니다.
기법과 스타일
페르난 레제의 붓질은 마치 산업 현장의 기계처럼 리드미컬하고 정교한 정확성을 띠며, 변화하는 시대의 맥박을 포착해 냈습니다. 그는 과거의 부드럽고 모호한 그림자에서 벗어나, 대신 강건하고 기하학적인 힘을 가진 언어를 통해 화면을 구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시도는 비평가들로부터 "튜브즘(Tubism)"이라 불리는 그만의 독창적인 입체주의 양식을 탄생시켰습니다. 이 스타일 안에서 세상은 원통형, 원뿔형, 그리고 입방체 형태를 통해 재해석되었으며, 이는 견고하면서도 역동적인 부피감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는 단순히 사물을 재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물이 지닌 본질적이고 구조적인 논리를 찾아내고자 했습니다.
그가 선택한 색채는 그 색이 채워진 형태만큼이나 확고하고 대담했습니다. 그는 원색이 주를 이루는 팔레트를 선호했으며, 때때로 강렬한 흑백의 대비를 더해 대상의 날카로운 경계선을 명확히 정의했습니다. 전통적인 환영주의적 기법에 의존하는 대신, 그는 대담하고 평면적인 색면을 통해 물감을 칠해 나갔습니다. 또한 캔버스 위에서 매체의 물리적 존재감을 강조하는 두터운 임파스토(impasto) 기법을 자주 사용하여, 그가 그토록 찬미했던 기계와 도시 구조물의 질감을 작품에 투영했습니다. 이러한 질감 중심의 접근 방식은 그의 작품이 현실에 단단히 뿌리 내린 물질성을 갖게 했으며, 그의 인물들은 종종 매끄럽고 기계적인 형태를 띠며 유기적인 인간의 형상과 현대 시대의 공학적 정밀함 사이의 경계를 허물었습니다.
숲속의 누드 (1910)
푸른 옷을 입은 여인 (1912)
파이프를 든 군인 (1916)
기술자 (1920)
말년과 서거
세계적인 갈등의 거센 파도는 결국 예술가를 파리의 예술적 교류로부터 멀어지게 하여 대서양 너머로 이끌었습니다. 1940년부터 1945년 사이의 미국 생활은 그가 오랫동안 캔버스 위에 옮기고자 애썼던 현대 세계에 대해 전혀 다른 관점을 선사한 시기였습니다. 이 해외 체류 기간은 그의 긴 예술적 진화 과정에서 잠시 숨을 고르는 휴식기이자, 언젠가 다시 돌아갈 프랑스의 토양을 꿈꾸며 거쳐 가는 전환의 순간이었습니다.
고국으로 돌아온 후, 그의 개인적인 삶에도 중대한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1952년 2월, 그는 나디아 코다세비치와 결혼하며 삶의 마지막 장을 열었습니다. 이 시기에도 그의 예술적 열정은 멈추지 않았으며, 거대한 규모의 벽화부터 섬세한 스테인드글라스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작품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세월이 흘러 노년에 접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제 무대에서 그의 위상은 변함없이 빛났습니다. 1955년, 그는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 대상(Grand Prize)을 수상하며 예술가로서 최고의 영예를 안았는데, 이는 안타깝게도 그가 세상을 떠난 해와 같았습니다. 페르난 레제는 1955년 8월 17일, 프랑스 지프쉬르이베트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유산과 영향력
페르난 레제는 당대의 전위적인 예술계를 훨씬 넘어선 깊은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그는 추상 예술과 구상적 재현 사이의 간극을 메움으로써, 예술가들이 인간이라는 주제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현대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제시했습니다. 그의 접근 방식은 기하학적 구조의 논리와 사람 및 사물이 지닌 인지 가능한 존재감 사이의 대화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순수하게 관념적인 영역과 만질 수 있는 실재 사이에서 중도적인 지점을 찾아낸 이러한 능력은, 이후 등장한 수많은 예술적 흐름의 방향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형태를 과감하게 단순화하는 그의 방식과 대량 생산 미학에 대한 매혹은 훗날 팝 아트 운동의 선구자적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기계 시대의 반복적이고 기능적인 특성 속에서 특유의 아름다움을 발견했으며, 이러한 관점은 이후 새로운 세대의 창작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로이 리히텐슈타인과 앤디 워홀 같은 예술가들은 대담한 윤곽선과 기계적 이미지를 활용한 그의 실험에서 대중문화에 대한 자신들만의 탐구로 이어지는 명확한 계보를 찾아냈습니다. 그는 자신이 캔버스 위에 옮기고자 노력했던 바로 그 산업적이고 상업적인 요소들을 찬미하게 될 시대의 시각적 언어를 미리 준비시킨 선구자였습니다.
위대한 행진
파란 모자를 쓴 남자
곡예사와 그의 파트너
오늘날 그의 작품을 만나는 곳
페르난 레제의 예술적 비전이 지닌 실재하는 존재감을 마주하기 위해 우리는 프랑스 남부, 특히 알프스 마리팀 주의 비오(Biot)로 여정을 떠날 수 있습니다. 이곳에는 그의 창조적 산물을 연구하고 보존하는 데 전념하는 공간인 국립 페르난 레제 미술관(Musée national Fernand Léger)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미술관은 과거 예술가 자신이 거주했던 빌라인 마스 생트-앙드레(Mas Saint-André)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벽면과 주변의 정원 안에서 그의 다채로운 세라믹 조각들은 본래 의도된 환경을 되찾아, 지중해 풍경의 빛과 공간 속에서 그의 형태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관람객에게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이 특별한 성소를 넘어, 그의 캔버스와 조각들은 세계 곳곳의 유서 깊은 기관들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프랑스의 예술역사박물관(Musée d'Art et d'Histoire)은 그의 작품들을 꾸준히 관리하며 프랑스 미술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 그의 존재를 각인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소장품들은 그가 기계 시대의 역동성을 어떻게 정지된, 그러나 맥동하는 시각적 형태로 번역해냈는지를 지속적으로 연구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의 독특한 미학을 찾는 여행자들은 다음과 같은 주요 컬렉션에서 그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포트 워스 킴벨 미술관(Kimbell Art Museum)
뉴욕 현대 미술관(Museum of Modern Art)
비오의 국립 페르난 레제 미술관
그의 영향력은 다른 예술가들의 작품 속에서도 여전히 잔향처럼 남아있지만, 그의 손길이 직접 닿은 예술을 목격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이처럼 확립된 예술의 보고를 찾는 것입니다. 미술관의 정돈된 공간에서 대담한 원통형 형태를 관찰하든, 고요한 정원에서 그의 조각을 마주하든, 관람객은 그의 평생의 업적을 정의했던 구조적 명료함을 동일하게 경험하게 됩니다. 그의 유산은 바로 이 장소들에 닻을 내린 채, 기하학의 진실을 갈구하는 이들을 위해 그의 회화가 지닌 묵직하고 기계적인 리듬을 영원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박물관
전시 중인 장소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기원과 역사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역사는 1764년, 베를린의 상인 요한 에른스트 고츠코프스키로부터 225점의 회화 작품을 수집하며 그 서막을 올렸습니다. 대제 카트린이 이 컬렉션을 시작으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박물관의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이 초기 수집품들은 훗날 서구 유럽 예술의 방대한 보고가 될 핵심적인 토대가 되었습니다.
본래 황실 가족만을 위한 은밀한 안식처로 시작된 이 공간은 1852년에 이르러 비로소 대중에게 개방된 공공의 장소로 탈바꿈하였습니다. 박물관은 매년 12월 7일, 성 카트린의 축일과 맞물려 그 창립을 기념하며 찬란한 역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박물관 복합 단지의 웅장한 건축미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궁전 강변을 따라 펼쳐진 이 박물관 복합 단지는 여섯 개의 역사적인 건물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중심에는 1754년에서 1762년 사이 프란체스코 바르톨로메오 라스트렐리에 의해 건립된 겨울 궁전이 자리 잡고 있으며, 이 웅장한 앙상블의 핵심을 이룹니다. 한때 러시아 황제들의 공식 거처였던 이 건축물은 주변의 여러 건물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수세기에 걸쳐 박물관의 규모를 확장하며 예술적 영토를 넓혀왔습니다.
건축적 진화는 1764년에서 1775년 사이 장-바티스트 발랭 드 라 모트와 유리 펠텐이 세운 소(小) 에르미타주를 통해 계속되었습니다. 이어 유리 펠텐은 1771년부터 1787년까지 건립된 대(大) 에르미타주의 설계에도 참여하며 박물관의 위상을 높였습니다. 이후 1842년에서 1851년 사이에 Leo von Klenze가 설계한 신(新) 에르미타주가 추가되며 그 화려함을 더했습니다. 이 경이로운 건축적 조화는 1783년에서 1789년 사이 Giacomo Quarenghi가 설계한 에르미타주 극장에 이르러 비로소 완성됩니다.
이러한 건축물들은 서로 연결되어 수많은 전시실과 회랑을 이루며, 그 안에는 인류의 보물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흐름을 만들어냅니다. 서로 다른 건축 양식들이 교차하며 보여주는 변화는 황실의 시대적 요구와, 이후 공공 기관으로 거듭나며 겪었던 확장의 역사를 고스란히 투영하고 있습니다. 이 정교한 공간적 배치는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도시 속에서 에르미타주 박물관이 지닌 존재감을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남아 있습니다.
방대한 서유럽 미술 컬렉션
에르미타주 박물관은 유럽 거장들의 숨결이 깃든 17,000여 점의 회화 작품을 소장하고 있으며, 그중 상당수는 묵직한 질감이 느껴지는 유화 작품들입니다. 이 경이로운 컬렉션은 라파엘로와 티치아노의 걸작을 포함하여 르네상스 시대의 정수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캔버스들은 서구 유럽 미술사를 관통하는 박물관 소장품의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하며 예술적 위엄을 드러냅니다.
17세기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영광은 베르메르의 섬세한 빛의 향연을 비롯한 다양한 걸작들을 통해 재현됩니다. 특히 이 시기는 네덜란드 초상화에서 나타나는 심오한 심리적 깊이가 특징입니다. 이 위대한 작품들을 통해 우리는 당대 예술의 기술적 변천사를 직접 목격하고 탐구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얻게 됩니다.
리타의 성모(Madonna Litta), 1490 - 레오나르도 다 빈치
플로라(Flora), 1634 - 렘브란트 판 레인
탕자의 귀환(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1662 - 렘브란트 판 레인
고전 및 고대 유물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컬렉션은 그리스 도자기와 더불어 고대 이집트 유물이라는 방대한 유산을 품고 있습니다. 특히 정교한 세라믹 작품들 중에는 북흑해 그리스 식민지 도시들에서 건너온 유물들이 포함되어 있어 그 역사적 가치를 더합니다. 이곳에 전시된 고고학적 기록들은 기원전 3천 년기부터 기원전 5세기에 이르기까지의 장구한 시간을 관통하며, 지중해와 흑해 지역의 물질문화를 직접적으로 연결해 주는 소중한 통로가 되어줍니다.
박물관의 여러 전시실을 거닐다 보면 헬레니즘 시대의 조각과 화려한 장신구들이 관람객을 맞이합니다. 로마 제국의 흔적은 대리석과 청동 조각,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응용 예술을 통해 생생하게 재현되어 있습니다. 기원전 1세기부터 서기 4세기에 이르는 이 로마 유물들은 고전 시대의 역사적 흐름을 따라 자연스럽게 배치되어,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한 경이로운 경험을 선사합니다.
조각과 장식 예술
에르미타주 박물관은 고전적인 양식부터 현대적인 표현에 이르기까지 12,000점이 넘는 방대한 조각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술적 성취는 30만 점이 넘는 방대한 공예품 컬렉션과 어우러져 더욱 깊은 울림을 줍니다. 가구와 보석, 금속 공예, 그리고 태피스트리와 의상 같은 섬세한 직물에 이르기까지, 이 다채로운 물질문화의 향연은 과거 시대의 일상적인 삶과 격식 있는 의례의 순간들을 생생하게 재현해 냅니다.
특히 도자기는 장식 예술의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하며, 컬렉션에는 2만 점 이상의 도자기 작품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양한 형태의 식기류와 함께 전시된 이 유물들은 정교한 세라믹 제작에 요구되는 고도의 기술적 정밀함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이토록 압도적인 규모의 유물들은 수 세기에 걸쳐 이루어진 집요하고도 광범위한 수집의 역사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습니다.
마돈나 리타 (Madonna Litta), 1490 - 레오나르도 다 빈치
꽃을 든 마돈나 (마돈나 베누아), 1478 - 레오나르도 다 빈치
무기 및 화폐 수집품
에르미타주 박물관은 군사 역사를 관통하는 방대한 유산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중세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의 세월을 견뎌온 15,000여 점의 무기와 갑옷들은 단순한 유물을 넘어 인류의 투쟁을 증언합니다. 이 경이로운 컬렉션은 수 세기에 걸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발전해 온 전투 기술과 신체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구의 진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물리적 기록물입니다.
또한, 박물관의 화폐 컬렉션은 그 규모 면에서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합니다. 1,000,000점이 넘는 화폐 유물과 다양한 유적지에서 발굴된 700,000여 점의 고고학적 발견물들이 함께 전시되어 있습니다. 금속과 석재로 이루어진 이 방대한 유물들은 과거의 무역 경로와 인류의 정착 패턴을 세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는 역사적 창 역할을 합니다.
소장품의 걸작들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컬렉션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네덜란드 황금시대를 상징하는 위대한 예술적 정수를 품고 있습니다. 특히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숨결이 깃든 1490년작 리타의 마돈나와 1478년경의 꽃을 든 마돈나 (베누아의 마돈나)는 시대를 관통하는 기술적 정교함과 인문주의적 이상을 완벽하게 투영하고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1596년에 그려진 카라바조의 류트 연주자에서는 어둠 속에서 형상을 빚어내는 극적인 명암법(chiaroscuro)의 정수를 목격할 수 있습니다.
또한, 네덜란드 거장들의 작품 세계, 그중에서도 특히 렘브란트 판 레인의 예술적 성취는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그의 걸작인 탕자의 귀환(1662), 플로라(1634년경), 그리고 성가족(1645)은 인간 영혼의 심연을 꿰뚫는 심리적 깊이를 보여줍니다. 빛을 통해 어둠으로부터 형태를 조각해내는 그의 탁월한 명암 조절 능력은 관람객을 경외감 속으로 인도합니다.
리타의 마돈나, 1490 - 레오나르도 다 빈치
탕자의 귀환, 1662 - 렘브란트 판 레인
꽃을 든 마돈나 (베누아의 마돈나), 1478년경 - 레오나르도 다 빈치
류트 연주자, 1596 - 카라바조
플로라, 1634년경 - 렘브란트 판 레인
성가족, 1645 - 렘브란트 판 레인